좋은생각
(2006.4)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서공임 님(47)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미대에 진학해서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하리라 다짐했다. 생각만 해도 신이 났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은 그녀가 대학생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부모님 역시 적당한 곳에 취직해서 스스로의 밥벌이를 알아서 해 주기를 바랐다. 상실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아무리 생활이 그녀를 할퀴어도 화가의 꿈은 절대 버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화방 앞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민화 수강생 모집'이라는 작은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곧 그곳을 찾아갔다. 가 보니, 웬걸 그곳은 민화를 대량으로 그려 내 판매하는 일종의 그림공장 같은 곳이었다. 잠시 갈등했지만 '그래, 뭐든 시작해 보는 것이 좋겠어'라는 마음이 소용돌이쳤다. 서공임 님과 민화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에..

민화 그리기의 첫 시작, 어떠셨어요?

-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 때 나는 그릴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어요.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민화를 판매하는 공장 같은 곳에서 접시 닦고 걸레질을하며 그림을 배웠지요.

원래 민화에 관심이 있어셨던 건가요?

- 관심이 있었다기 보다 관심을 갖게 된 것이죠. 민화를 그려야지, 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니까. 하지만 고향의 자연풍광들, 전통혼례식 때 봤던 풍속화들, 병풍 그림들 등 민화의 소재가 낯설지 않았어요.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 물론 힘들었죠. 똑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그려야 했고, 잔심부름을 많이 했으니까요. 또 작업 환경도 열악해서 겨울만 되면 손가락에 동상이 걸리곤 했어요. 그렇다고 일정한 수입이 있는 것도 아닌, 차비 얼마 받는 정도였죠.


그만둬야지, 하는 생각은 안해보셨어요?


- 왜 안했겠어요.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 많이 했죠. 부모님도 반대가 심했고요. 그래서 어느 날인가, 친척 오빠의 소개로 동양화를 그리는 화가 한 분을 만났어요. 그분이 민화는 꼼꼼하고 섬세하게 그리는 세필화인 탓에 동양화를 배우려면 민화를 다 잊고 오라고 하셨어요. 근데 이상했죠. 버리지 못하겠더라구요. 그래서 그 공장 생활을 7년이나 계속했어요.

7년이나 머물렀던 다른 이유가 있나요?

- 우선 나는 좀 예민하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민화 같은 세필화를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혼자 남아 그림 공부를 하는데 푹 빠져 있을 때라 그동안 쌓았던 그 시간들을 버리고 싶지 않았고요. 동양화의 기본 서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계자원>이라는 책을 보면서 바위, 잎사귀, 풀을 수 없이 그려봤어요. 내 인생 중 가장 기특했던 시간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러면서 순전히 독학으로 민화 작가가 되신 거예요?

- 초기 도제교육을 받으며 민화의 기본 기술을 배운셈이죠. 모르는게 생기면 책을 보면서 직접 그려 보기도 했고요. 그 뒤 홍익대학교 미술교육원에서 수묵화를 배웠고, 동국대 불교 대학원에서 예술사학을 수료했어요.

첫 전시회는 언제 하셨어요?

- 1996년 <오늘과 내일>이라는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었어요. 1986년 7년간의 도제 생활을 끝내고 독립했으니까, 10년 동안 준비해서 이뤄 낸 결과였죠. 팸플릿 제작만 두 달 넘게 걸렸고, 홍보도 언론사를 찾아다니며 직접 했어요.

'호랑이 100마리와 사는 여자'란 별칭은요?

- 1998년, 호랑이해를 맞아 호랑이 100마리 그림을 전시했어요. 꼬박 2년을 호랑이만 그려 준비한 것이었죠. 전시를 하려는데 IMF가 터졌어요. 속으로 걱정했는데, 복을 가져다 준다는 호랑이의 상징 덕분에 침체된 사회 분위기에 좋은 부적이 되면서, 관심을 끌었고 이름도 많이 알려졌어요. 그 때 모신문에 '100마리 호랑이를 기르는 여자'라고 소개된 탓이에요.

주로 동물그림 전시를 많이 하셨던데요?

- 호랑이를 시작으로 용과 닭을 그렸고, 지난 2월, 열한 번째 개인전에서는 병술년에 맞춰 개 그림을 전시했어요. 그 외에 연꽃, 새, 병풍, 사랑의 상징, 부채 그림등을 전시했어요.

특정한 테마로 전시를 하는 이유가 있나요?

- 누군가에게 좋은 참고서가 되고 싶어서요. 호랑이 그림을 그리려면 여러 자료를 봐야 하는데, 이미 그려진 100마리 호랑이가 있으니 시간을 벌 수 있잖아요.

아이디어는 어디서 받으세요.

- 소재가 떠오르면 그것에 맞춰 그때그때 자료를 찾아요. 연꽃을 그려야지 하면 연꽃을 보러 어디든 가는거죠.

그럼 외에 다른 활동이 있다면요 ?


- 대학부설 사회교육원에서 민화 강좌를 열고 있고 '아파트를 한옥처럼'이란 주제로 강의를 합니다. 물고기가 과거 급제를 상징하니, 그 그림은 수험생 방에 걸면 좋다는 식의 강의에요. 민화가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하는 것이죠. 또 최근 유니세프카드에 내 그림이 선정돼 기뻐요.

요즘의 관심분야는요 ?

- 십장생이나 까치, 모란꽃, 나비, 문자도에 마음이 끌려요. 문자도는 충, 효 같은 한문을 활용해 그려본 적이 있는데, 한글을 활용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1년 넘게 정조의 화성행차 모습을 작업하고 있는 중입니다.

올해 특별한 계획이 있으세요 ?

- 여태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오직 그림만 생각하며 달려왔어요. 올해엔 좀 여유를 가지면서 해외 전시를 계획해 보려고 합니다.

글/ 한윤정기자 사진/최연창 기자

나의 경력,나의감사

첫 개인전을 무사히 끝낸 1996년 어느 날, 당시 우리나를 방문했던 스페인 국왕 내외가 나를 찾아왔어요. 국왕 내외 앞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매우 긴장되는 순간이었는데, 왕비가 갑자기 신발을 벗더니 무릎을 꿇고는 조용히 내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거예요. 나를 예술가로서 존중해 준 것이었죠. 대학교 못 나왔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든든한 후원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무척 감동 받았습니다. 그 일을 통해 용기를 얻었고 뭐든 열심히 준비해 놓으면 좋은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음을 깨달았어요. 덕분에 주문이 있건 없건, 전시 계획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 할 수 있었지요.

그리고 주변의 좋은 분들도 그림에 몰두 할 수 있게 도와줬어요. 첫 개인전을 열었던 백상기념관 관장님은 훗날 훌륭한 화가가 될 거라며 눈에 띄는 경력이 없는 나를 격려해 줬어요. 돈이 없어 작업실을 마련하지 못할 때 선뜻 도와주었던 친구들, 전시회 팸플릿을 외상으로 해 주었던 분들, 내가 자존심 상해 할 까봐 나 모르게 그림을 주문하고 사 주시는 지인들. 그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